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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되면 조상 탓!
신북면 신평리 인평대군 묘 답사기
시민기자 서상경

신북면 신평리 인평대군 묘 답사기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는 궁말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다. 왕족이 죽어서 묻힌 무덤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궁말의 뒷산 왕방산 자락의 너른 터에 묻혀 있는 분은 조선 인조의 셋째아드님 인평대군이다. 그는 어떻게 한양에서도 제법 먼 곳인 이곳에 묻혀있는 것일까? 그 사연을 찾아 묘역을 찾아보았다.
43번국도 철원 방향으로 진행하다가 신북면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면 신평교차로에 닿는다. 경복대학교 방향의 신평교차로 버스정류장에서 왼쪽 산자락에 있는 묘역을 볼 수 있고 좁은 마을길을 100m 들어가면 묘역 주차장이 있다.
 
▲ 문인석  ⓒ 시민기자 서상경

인평대군 묘 아래쪽에 안내문이 보인다. “인평대군은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으로 자는 용함, 호는 송계이다. 인조 7년 인평대군에 봉해졌다. 병자호란 이후 인조 18년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온 이후 효종 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학문에도 소양이 깊어 제자백가에도 정통하였고 시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중국인 화가 맹영광과 가깝게 지내기도 하였다.”

그는 인조와 어머니 인열왕후 한씨 사이에서 1622년에 태어나 1658년 36세에 죽을 때까지 왕족으로서 파란을 겪게 된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아버지 인조가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한편 소현세자,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가서 8년 동안 인질로 있다가 돌아오자 뒤를 이어 볼모로 잡혀갔던 것이다. 이듬해 돌아오긴 했으나 그 뒤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관의 중책을 치러야 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압록강보다 더 북쪽인 심양은 겨울에 오줌을 누면 오줌발이 그대로 얼어붙을 만큼 추운 곳이라 하니 나라 잃은 설움을 톡톡히 경험했으리라.
 
▲ 안내문  ⓒ 시민기자 서상경

묘역의 아래쪽에는 신도비와 치제문비가 있다.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에 세워 죽은 이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라면 치제문비는 후대의 왕들이 죽은 이의 인품과 업적을 치하하며 지은 비문이다. 신도비 비문은 왕명을 받아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경석이 지었고 비문의 글씨는 오준이 썼다고 한다. 또 치제문비는 하나의 비각 안에 2개가 안치돼 있는데 오른쪽의 제1비는 앞면에 효종이 직접 쓴 제문이고 뒷면에는 숙종의 제문이다. 왼쪽의 제2비는 앞면 상단에 영조의 어필, 아래쪽에 정조의 글씨를 담았다. 네 분 왕이 친히 제문을 지었고 인평대군을 위해 자주 제사를 올렸다고 하니 그의 인품이 어땠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 신도비  ⓒ 시민기자 서상경

▲ 치제문비  ⓒ 시민기자 서상경

인평대군이 병으로 일찍 죽자 처음에는 경기도 광주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인평대군에게는 복녕군,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네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복녕군이 32세로 일찍 죽었고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3형제는 숙종 때 역모를 꾀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고 만 것이다. 이를 삼복의 변이라 한다.
그러자 후손들은 인평대군의 묫자리가 나쁜 탓이라며 명당을 찾아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 인평대군묘  ⓒ 시민기자 서상경

인평대군의 묘는 유명 풍수가들이 찾아 명당으로 여긴다고 한다. 한북정맥에서 이어진 천보산맥의 정기를 받은 왕방산 자락이고 건너편은 운악산과 수원산, 여기서 분기한 천주산 연맥이 마주하는 곳이다. 또한 앞에는 포천천이 흐르고 있으니 땅의 기운은 새어나가지 못하고 이곳에 모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그 후 그의 후손은 남연군과 흥선군으로 이어져 고종과 순종 두 임금을 배출했다. 왕방산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의 보덕사를 방문했고 광해군이 사냥을 왔다는 등 왕기가 서려 있어 언젠가는 왕을 배출할 것이라는 설이 꾸준하게 이어져 왔던 것이다.


▲ 묘역에서 바라본 전경  ⓒ 시민기자 서상경

인평대군 묘역은 곡장을 두른 봉분과 커다란 비석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상석, 양옆으로 특이하게 동자상을 닮은 작은 문인석이 있다. 앙증맞고 표정은 매우 귀엽다. 그리고 양 옆로 한 쌍의 망주석과 턱에 홀을 대고 있는 문인석이 있다.네 분의 왕이 직접 치제문을 쓸 정도로 각별함이 있는 묘역은 원형이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되어 있고 또 신도비는 경기도의 많은 신도비 중에서 으뜸가는 조형미로 평가를 받고 있어 가치가 높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좋은 학습 장소가 될 것 같다.
※ 포천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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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된 의견글 1
  • 권영희 2020-09-12 삭제
    몇년전 포천향교 명륜대 학생으로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때는 사진을 찍고 생각없이 기록 남기는 것으로 여념이 없었습니다 문득 포천소식이 궁금하여 폰으로 열어보니 뜻 밖에 예전 답사지 가사문을 읽어보면서 새삼 되 새기게 되네요 토욜 아침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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